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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30일.
천둥소리에 놀라 잠을 깨다. 천둥소리가 저리 규칙적인가. 조용한 새벽. 똑딱 똑딱, 탁탁 탁탁. 일어나라, 깨어라. 방안 가득 울리는 죽비 소리. 다시 살아 있음을 천둥처럼 확인한다. 무얼 했느냐, 어디로 가느냐. 일어나 고쳐 앉아 정면으로 응시한다. 세월은 무심이거늘 어찌 그리 재촉하는가.
평소보다 일찍 나가다. 주간활동보고서 빈칸을 막막하게 한참 바라보다. 기록할 만한 것들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뭐 그리 대단한 성과도 없다. 내게 이 책무를 부여한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보고할 것인가. 그 사람은 편하게 던졌지만 내내 아프게 잊혀지지 않는 말이 맴돈다. '사람 하나 바뀐다고 크게 변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점심 먹기 전 대전교도소로 출발. 이미 기결수로 출역 나갈 구상을 자연스레 말하는 정환윤, 외려 재판이 생각보다 빨리 결심된 듯하단 말이 더 오래 가슴에 남는 까닭은 무엇일까.
충남도청에 들러 도지사 면담. 자치경찰이라면 유성기업 현장에 공권력 투입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 공감을 표시하고 노사민정이란 틀은 고집하지 말고 현실적인 정책협의가 필요함을 말하다. 그나 나나 민초 한 사람이나 존재의 무게는 비슷할 터, 그에 바탕을 둔 사회를 지향한다면 기회가 주어졌을 때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게 정치가 아닐까 생각했다.
서산으로 가서 상집회의를 하다. '회의 자료를 만드는 시간보다 빨리 회의가 끝났다.'는 얘기는 회의 자료를 잘 만들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회의가 의기투합으로 잘 되었다는 뜻일까? 모두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달려가는 동지들이 고맙다.
2012년 1월 31일
날이 밝자마자 떨어진 땔감을 조금 마련해 놓고 이른 아침에 서울행 열차를 탔다. 중집회의와 대의원대회가 연이어 열리는 날. 중집회의 선거방침 최종 논의는 빠르게 의견분포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의장이 '함께 살자'는 총파업 투쟁과 전술적으로 집중 투표할 정당에 대해 조합원 총투표를 진행한다는 안을 상정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반복되는 논리의 지속,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 관철하려는 조급함이 섞이니 말에 감정이 묻어나는 동지들. 지도자로써 성숙함과 품격을 조금 더 발휘했으면 좋겠다. 몇 차례에 걸쳐 토론한 총시간의 반 정도를 상대의견 요약 발표하기 등 상호이해를 높이는 프로그램으로 진행했으면 어떨까 싶었다.
점심 이후 대의원대회. 쌍용차지부장이 '20번 째 죽음을 막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할 때, 대형화면으로 중계되는 그의 눈빛은 처연했고 나도 눈물이 맺혔다. 투쟁 유인물보다 정치 유인물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아쉬웠다.
보통 오륙백 명이 참여하는 대의원대회를 보면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는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연상된다. 누구나 자유롭게 얘기한다. 시간이 좀 걸리지만 자연스레 모아진다. 어떤 땐 심도있는 토론보다 약간의 선동이 보태지기도 한다. 비슷한 의견이 계속되기도 하고 일부는 졸기도 한다. 시끄럽기도 하고 의견이 충돌되기도 하지만 소수의견을 배려하는 다수의 결정으로 총의를 모아내는 민주주의는 작동한다. 하지만 아테네 민주주의 단점으로 지적된 중우정치 비슷한 정파정치의 단면도 보이지 않나 싶다.
대의원도 아니고 여러 차례 만나자는 노동자가 있어 어두워지기 전에 열차를 탔다. 눈발이 사정없이 휘날리는 희뿌연 하늘에 오리떼가 날아간다. 어둠을 헤치는 질서있고 힘찬 날개짓. 한 점 두려움도 없는 듯하다.
2012년 2월 2일.
'연기군이 올해 7월 1일이면 세종특별자치시가 됩니다. 공주와 청원 일부를 포함해서 인구 10만 명 정도입니다. 엄밀히 말해 이제 충남은 아니죠. 4.11선거에서 시장과 교육감을 뽑는데 국회의원도 단독 선거구로 여야 합의했다고 합니다. 후보만도 이십 여명이 넘는다고 하네요. 민주노총에서 세종시위원회를 만들면 적극 참여하겠습니다. 할 일 많을 겁니다.'
공무원노조 지부, 건설기계 지회, 전교조 지회, 사회보험노조 지회, 지역노조 사업장지부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점심시간을 이용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의기투합하기엔 충분했다. 갑자기 연락드렸지만 동네이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한 명은 선약이 늦어져 두 시간 넘게 기다렸어도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조치원에 가는 길은 천안으로 돌아갔다. 간헐적이지만 이틀 눈이 내려 도로가 얼었을지 몰라서 큰길을 선택했다. 라디오에서는 55년 만에 가장 낮은 2월 기온이라고 호들갑. 1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도심 눈 치우는 속도는 천안이 아산보다 빠른 느낌. 누구에게 물어봐도 비슷하다. 근데 조치원은 한참 더 떨어지는 듯. 지방자치 시행된 지도 15년이 넘었는데 이런 차이는 왜 날까? 시장 군수의 정당 차이는 아닌 듯하다.
돌아오는 길은 길이 녹았으리라 생각하고 빠른 길을 선택했는데 두 배나 더 걸렸다. 천안공원묘원 고개와 광덕리, 아산 수철리 고개는 그야말로 빙판길. 운전대를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가 아플 지경이었고 차량이 교차할 때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차라리 하나도 녹지 않은 구간이 나았다. 아예 서로 거북이 속도로 가니까. 하지만 가운데 바퀴자국만 녹은 구간에서는 약간 속도를 내게 되고 가끔 위험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트럭과 교차할 때, 한쪽 바퀴라도 녹은 구간에 걸치려고 눈치보다 위협을 느껴 순간적으로 얼은 쪽으로 핸들을 틀다 도랑에 빠질 뻔 했다. 결국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늦은 저녁엔 여의도에서 열린 양사모에 참석했다. 87년 말 구로구청에서 대통령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최루탄 군홧발에 밀려 추락, 반신불수가 되어 평생을 고통 속에 살면서도 내색 없이 늘 담대하게 삶을 꾸려가는 친구.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인도하는 등대이며 언제나 나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2012년 2월 3일.
대전고등법원 316호 법정. 방청객 숨소리마저 들릴 듯한 긴장감 속에서 판사는 무미건조하고 낮은 목소리를 이어간다. 사실관계란 이름으로 피고측 주장은 배척되고 경찰의 입장에서만 법리해석은 이뤄진다.
'정환윤 삼년 실형, 신기철 삼년 실형.' 그가 남의 일처럼 마지막 기대마저 간단히 무너뜨리자 일순 법정은 진공으로 빨려드는 듯 했다. 누군가 내지른 '힘내세요'란 외마디마저 숨죽인 분노에 묻혀버렸다.
아, 저 자본의 탐욕과 국가폭력을 일방적으로 집행, 비호하는 자들. 배경과 형평, 그리고 인과를 무시한 과도한 형량에 모두 말문이 막혀버렸다.
'감정이 격해져 자꾸 말이 끊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정권을 제대로 바꿔야만 동지들이 나올 수 있겠다 싶습니다. 노동이 존중되는 세상을 향한 길에 바쳐지고 있는 동지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열심히 끝까지 싸웁시다.'
돌아오는 차 안. 점심을 거르고 부지런히 달려갔던 사람들 누구도 밥 먹자는 얘기조차 하지 않았다.
동이 터오길 기다려 경남제약 출근길 선전활동에 참여하려 출발. 신창에 도착하니 막 아줌마 두 분이 차에서 내린다. 현수막을 펴고 세 명이 추위와 싸우고 있는데 지역노조에서 한 명이 동참한다. 금방 금속노조 국장이 두툼하지만 여전히 멋진 긴잠바 차림으로 오고, 잠시 후 방송차에 가득 타고 현대제철 간부들이 모여 들었다. 입김과 콧김까지 힘찬 인사들. 막 퍼지기 시작한 햇빛에 아주 미세한 얼음 알갱이들이 공기 중에 반짝인다.
점심 전에 홍성의료원지부 병원로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선전농성에 참여했다. 비정규직 철폐, 최소한의 임금인상이 요구. 몇 년 만에 마음이 모아졌다며 활기차다. 휴업중인 세림산업지부장이 동참하고 사회보험분회장도 다녀갔다. 홍성위원회에 대한 공감을 여러 단위에서 확인했다.
저녁 때 쯤 잠정합의안이 노사간에 도출되었다는 감사전화를 받고 별로 한 일이 없어 머쓱했다. 부엌 수도가 얼었다고 연락이 오고 편향된 재판으로 심란했던 하루,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었다.
2012년 2월 4일.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전전반측. 삼년 실형을 받은 두 사람을 생각하며 몇 주 만에 술 한잔 먹지 않고 들어왔다. 자정 무렵 잠들었으나 밤새 뒤척였다. 속은 비었으나 생각이 넘쳐 그런가. 비몽사몽간에 흩어졌다 이어지는 상념의 고리는 주체의 연대. 분노와 탓은 결국 재로 변한 뿐, 닦이고 닦은 영롱한 혼들이 서로 연결되어 세상은 나아지리라.
좌부리 마을 달집태우기 행사 준비에 참여해달라는 방송을 듣고 냇가로 나갔다. 오며 가며 보긴 했지만 직접 보니 이미 많이 진척되어 있었다. 주말도 집에 있는 날이 별로 없어 참여할 시간이 없었다. 일 년에 몇 날 되지 않는 마을 일이고 이사 온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 나간 김에 별 말 없이 부지런히 이것저것 도왔다. 짚새기로 만든 옛날 멍석이며 삼태기며 짚신을 갖다 놓고 체험도 할 수 있는 행사장을 꾸미는 일들이다. 30여 명 중 젊은 사람은 몇 사람에 불과했다. 내일 행사에는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함께하자고 한다.
오후 늦게부터 잠이 들었다. 잠결에 몇 번이나 몇 시냐고 묻고 또 자길 반복했다. 스님들이 일어나는 시간에야 정신이 들었다.
2012년 2월 5일.
해 뜨고 조금 지나 마을 행사에 나갔다가 보름직전달이 중천에 떠오를 즈음 돌아오다. 좌부천변 초등학교 운동장보다 조금 적은 크기의 행사장. 한 달 전쯤엔 사람 키 대여섯 배 크기의 달집이 엄청 커 보였는데 막상 행사용 몽골텐트가 여나믄 동 연이어 쳐지자 작게 보였다. 농사용 보온덮개를 바닥에 깔고 임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을 했다. 빨리 붙이려고 불쏘시개를 자꾸 건드리자 노인 양반이 '마누라와 불은 건드리는 게 아니야'라며 웃는다.
짚으로 만든 생활도구 전시장에 가서 거들었다. 전시품 외에 멍석 위에서 짚신, 삼태기, 매방석 등을 일부 만들어 놓는다. 구경꾼이 오면 시연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 새끼 정도 꼬는 실력이라 별 도움은 안 되었지만 여러 어르신들이 '확실히 배워서 내년에는 직접 해보라'고 격려성으로 꼬신다. 다들 앞으로는 누가 동네에서 직접 이런 걸 만들어서 하겠느냐고 걱정하면서.
점심이 지나 길놀이부터 행사가 진행되자 저녁까지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좋은 보직을 받아 즐거웠다. 막걸리를 퍼주고 소주를 내주는 일에 컵과 나무젓가락을 나눠주는 역할. 소주는 그냥 주면 되는데 막걸리는 항아리에 부어서 국자로 주전자에 담아주거나 컵에 따라 주어야 했다. 몇 시간 지나니 옷이 온통 막걸리 튀긴 자국이다. 그래도 재밌었다. 누구에게 주는 일은 즐겁다.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부담없이 권할 수 있었다. '막걸리 한잔 하고 복 많이 받으세요.'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받는 사람도 좋아했다.
오후 내내 사람들은 날씨가 제대로 풀렸다고 덕담을 주고 받았다. 불과 몇 일 전에는 살을 에는 추위더니 입춘이 하루 지나니 거짓말처럼 봄이 온 듯 했다. 저녁에 맡은 일도 좋았다. 오곡밥을 먹고 나서 남은 잔반을 버리는 곳에서 짬통에 제대로 붓게 하고 식판을 수거하는 일. 비록 손에 오물을 묻히고 가끔 옷에도 튀었지만 '잘 먹었다'는 인사를 아마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었을 게다.
'제 8회 설화 달집 태우기'. 막상 달집을 태울 때는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었다. 어두운 밤에 조명을 끄고 달집만 태웠으면 말 그대로 소원을 비는 약간 엄숙한 분위기였을 텐데. 달집을 태우는 순간 불꽃놀이를 벌이니 하늘을 수놓는 다양한 불꽃은 화려했으나 막상 달집 태우는 불은 초라했다. 화려한 폭죽에 소원을 빈다면 그냥 터뜨려졌다가 순간에 사라지는 꼴이지 않을까. 그나마 마지막에 풍등을 띄우니 분위기가 조금 나았다. 밤하늘에 퍼지는 붉은 염원들. 민초들이여, 모진 삶이어도 무병장수, 자손번창하시라! 탄압받고 시련 중에 있는 노동자들이여, 끝내 승리하는 날까지 건강하시라!
달빛에 선명한 눈 쌓인 설화산을 보며 집에 돌아오는 길. 보름날 '불 지핀 깡통 돌리기' 하려고 며칠씩 깡통을 찾아 길거리를 헤맸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쥐불놀이라 했던가? 쥐불놀이 열심히 하던 세대들이여, 올해는 제대로 쥐를 잡아보세.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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