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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3일.
음력으로 새해, 임진년이다.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흑룡의 해라면서 흑룡은 반란의 기운을 뜻한다고 성급하게 정권교체로 연결하기도 한다. 그래도 임진년 하면 암기식 교육 탓인지 대게 임진왜란이 먼저 떠오른다. 지배층의 무능과 분열로 왜국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였던 조선. 왕은 북쪽 국경으로 도망가고 민초의 삶은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이순신 같은 영웅도 탄생했지만 지배층의 권력다툼은 지속되었고 명국에 대한 의존과 사대는 심화되었다.
임진년 정월 초하루 날, 나는 무엇보다 정권교체를 염원한다. 이명박 정권 마지막 해, 이순신이 살아오더라도 현 집권층을 이어가게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고 단순히 왕의 교체만을 원하지 않는다. 지금 왕의 폭정이 심해서 ...지난 왕이 조금 낫다고들 하지만 그 때도 민초들의 삶은 어려웠던 것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으로 조금 더 나아가는, 어떤 왕이 와도 결코 후퇴시킬 수 없는 제도와 체제를 만들어가는 의회권력과 정권의 교체가 필요하다.
사위가 밝아질 즈음, 설날 아침 형 집에서 부모님에 대한 추도식을 진행하다. 형이 개신교를 믿기에 그에 따른다. 처음으로 누나네 식구들이 함께 참여하였기에 형수는 부모님이 어느 때보다 기뻐하실 거라고 강조했다. 자형이 기도하는 중에는 갑자기 영하 10도로 내려간 날씨에 노상에서 고생하는 모든 이들이 건강하길 바랐다.
추도식 후 누나네는 서둘러 시댁으로 가고 우리는 차례를 모시러 작은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장손이 개신교를 믿으니 작은아버지께서 조상들의 제사를 지낸다. 부모님을 제외한 할아버지부터 조상께 차례상을 차리고 절을 올린다. 술을 먼저 따르고 떡국을 권하는 순서다. 술꾼들이 ‘빈속에 한잔하고 밥을 먹는’ 이유가 전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새삼 깨닫다.
명절마다 주기도문도 외우고 절도 하면서 나는 종교나 관습의 이름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는 세상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 종교나 관습을 융통성있게 수용하는 세상을 꿈꾼다. 비록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기에.
2012년 1월 24일.
설날 휴일 마지막 날, 느지막한 오전에 할 일이 있어 출근하다. 화장실 창문이 열렸는데도 다행히 얼진 않았다. 물을 내려 확인하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복사기와 켜있는 모니터들을 껐다. 혼자 있는 사무실, 온풍기를 켤까 말까 망설이다 말았다. 아산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에서 부탁한 인사말을 쓰다 보니 발이 시렵고 손이 곱았다. 잠시 온풍기를 켜 손을 녹이고 누가 볼 새라 다시 껐다.
점심때가 지나자 법률 담당하는 동지가 나왔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휴일에도 나올 정도로 업무가 많아 노총각으로 늙어 가는가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온풍기를 틀고 있지 않고 있으니 그 친구도 그냥 일한다. 너무한다 싶어 온풍기를 틀었다. 한참 지나니 우리 집보다 따뜻했다.
업무일지 따위 소소한 두세 건을 더 썼다. 근데 인터넷이 되지 않아 처리하기 어려웠다. 요즘은 인터넷이 안 되면 일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세 시경 나와 동네 근처 두 군데에서 막걸리 한 병씩 얻어먹고 집에 돌아왔다.
2012년 1월 25일.
눈이 적게 내린 걸 만회라도 하듯 발목이 빠질 만큼 눈이 내렸다. 날이 밝자마다 눈 치우기에 나섰다. 집에 들어온 날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눈이 내리는 날 일이 있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면 좌불안석이다. 노인들이 많이 사는 시골에서 젊은 놈 집만 눈이 쌓여있으면 흉이 되기 때문이다.
마당이야 손바닥만 해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시골 마을 안길은 집과 집 사이의 거리가 도시와 비견되지 않기에 의무구간이 꽤나 된다. 한 시간 가까이 밀대로 밀고 대빗자루로 마감을 했다. 손이 시렵더니 이내 땀이 맺혔다. 지나는 사람과 인사할 때마다 웃음가득 뿌듯했다.
눈을 치우고 설화산에 올랐다 백구는 신나게 눈 속을 내달렸다 돌아오길 반복하더니 이내 혓바닥을 내밀고 헥헥 거린다. 아무도 걷지 않은 산길. 뒷사람을 의식해 올라가기 좋은 지점으로 길을 내려 신경을 썼다.
하지만 자주 다니는 등산로인데도 몇 번이나 약간씩 빗겨 내딛는다. 한석봉이와 어머니는 잘도 했다는데. 전문가일지라도 늘 조심하고 겸손할 일이구나. 정상에 오르니 눈 쌓인 들판과 마을, 시내에 햇살이 따뜻하게 퍼지고 있었다.
출근해서 얼마 있다 재판 방청하러 대전으로 향했다. 눈길이라 일찍 출발했다. 작년 6월 유성투쟁관련 경찰과 충돌 건 항소심 결심. 동지들의 최후진술에선 1심 4년의 중압감을 느낄 수 없었다. 내게 더 책임을 물으라는 우리 부장의 얘기는 가슴에 꽂혀 항상 내 나침반으로 역할 할 것이다.
저녁엔 누추한 집으로 의정부에서 두 동지가 찾아와 늦도록 별의별 얘기를 다하다 함께 잤다.
2012년 1월 26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 회의시간을 지키기 위해 서울역에서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경향신문 사옥까지 가려면 큰길 횡단보도 세 개를 건너야 한다. 근데 다니던 중 처음으로 적당한 때에 녹색 신호등이 켜져 한번도 멈춤 없이 뛸 수 있었다. 우연이었겠지만 기분 좋았고 괜히 뭐든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오후 두 시부터 시작한 회의는 금세 두 시간이 넘었다. 학교비정규직노조를 민주노총 가맹조직으로 승인 하느냐에 대한 안건. 6개월이 넘었고 회기를 넘기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고. 연맹으로 승인 하느냐 공공운수연맹으로 포함시키느냐의 문제로 팽팽했다.
'대산별 원칙도 살리고 조직갈등도 고려하며 복수노조 시대에 부응하려면 17번째 연맹승인은 보류해야합니다. 대신 공공이 아니더라도 기존 연맹에 가입하여 민주노총으로 활동하게 합시다. 최대한 빨리 교육연맹으로 모아나가는 전제로.'
정회를 거듭하고 허심탄회한 논의 끝에 더 좋은 안으로 결정되었다. 교육노조협의회를 2월안에 출범시키고 학비노조는 이에 가입하여 민주노총의 지위를 확보하며 1년 안에 공공운수연맹 전회련 학비본부와 통합한다로. 모두 한발씩 물러나 조합원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성숙함을 발휘했다. 모두 박수치며 후련해했고 투쟁하는 동지애로 하나 되었다.
이어진 정치방침과 선거방침 토론. 일단 큰 진전은 배타적 지지를 총선 이후로 미루고 일단 선거방침으로 가자는. 것. 마지막 쟁점은 정당투표건. 진지하지만 지리한, 필요하지만 뻔한, 누가 무슨 입장일지 예측 가능한 논의가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 표결과 퇴장이 충돌하다 결국 다음으로 넘겼다.
여덟 시가 넘어 다함께 저녁 겸 막걸리 몇 잔 마시고 열차 타러 가는 길. 서울역까지 세 개의 횡단보도 모두 걸렸고 열차 건널목까지 잡혔는데 기차가 두 대나 지나가 하마터면 내려오는 열차를 놓칠 뻔 했다.
2012년 1월 27일.
사무실과 복도, 화장실과 계단까지 청소를 마치니 30분이 훌쩍 지나갔다. 설 연휴로 모처럼 열린 아침 점검회의. 한참 얘기하던 중 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언급한다는 지적을 받다. 그러면 토론과 참여 공간이 적어지고 시키거나 시키는 대로 하는 꼴이 된다는데 공감. 부쩍 대화를 평소 많이 하자고 강조하면서도 내 얘기를 먼저 내세우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다. '20년을 살고 있는 부부간에도 눈으로 얘기하기 어려우니 일상 표현과 대화를 자주 하자'는 부분에다 역할도 고려하여 반영하는 실천이 필요할 듯.
'소속과 직책을 뛰어넘어 지역노동운동의 방향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론합시다. 노조든 단체든 본부장이든 활동가든 조합원이든, 계급장을 떼고 자유롭게 얘기합시다. 어떻게 지역사회에서 조직노동자 뿐 아니라 미조직노동자, 나아가 민중의 이해를 실현해 나갈 것인가. 현안투쟁도 어렵지만 조금만 멀리 봅시다. 우리부터 소통하고 서로 배우고 치열하게 투쟁하면서 만들어 갑시다'
저녁에 열린 민주노총충남본부 1차 정책토론회에 20여 동지가 참여해 다양한 얘기를 펼쳤다. '지역노동운동의 방향과 지역사회 개입전략'이란 주제로. 시군지역위원회를 강화하자. 노동자 조직화 사업에 산별 구분없이 함께 나서자. 사회운동 노동운동으로 노조틀을 뛰어넘자. 노동자를 위한 조례제정과 같은 지자체관련 사업을 추진하자. 집중할 수 있는 토론주제를 중심으로 하자 등등.
처음이고 주제가 광범해서 모아지는 부분은 부족했지만 지역역량을 모아가는 월례토론회의 취지는 충분히 살려졌다. 아쉽게도 조직이 튼튼한 금속노조가 휴가가 길어서 그랬는지 참여하지 못했다. 시간이 늦고 갈 길들이 멀어 뒤풀이는 몇 명만 참여했다. 그 중에는 몇 년을 보면서도 처음으로 술 한잔 한다면서 얘기꽃을 피우는 동지들도 있었다.
2012년 1월 28일
서울로 가는 열차 안. 옆 좌석엔 화장을 곱게한 젊은 여자가 양 옆에 어린 딸 둘을 앉혀놓고 스마트폰에 열심이다. 너댓 살이나 두세 살 정도의 딸들은 작은 노트북 만화영화에 얼굴이 빨려들 듯하다.
어릴 땐 밭일이나 누에치는 부모님 도왔고 주로 보리밥이나 밀가루 음식을 먹고 살았다. 일 년에 한번쯤 젊은 오촌 당숙이 소년동아 등 만화책 몇 권 가져오면 며칠 동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중고등 땐 내 공부방과 워크맨을 갖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끝났다.
20대 들어서는 거리에서 최루가스와 뒹굴었고 몇 년은 공장에서 용접과 자재 일을 했다. 그 즈음 월급의 대여섯 배가 넘는 컴퓨터가 나왔고 단체 사무실에서 도스와 보석글, 아래아 한글을 익히느라 꽤나 수모를 당했다. 몇 년 후 피시를 장만했고 피시통신으로 사진 한 장을 받기 위해 밤을 새우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무전기 같은 핸드폰이 나왔으나 너무 비싸 삐삐만 차고 다녔다.
농촌에서 도시로, 산업화시기를 거쳐 정보통신시대로 급변하는 세태를 살아온 나. 젊은 엄마를 보면서 여러 감회에 젖어 쳐다보는 시간이 길었는지 그 사람은 부담스레 눈길을 돌렸고 머쓱한 나도 고개를 숙였다.
늦은 오후에 한미fta 폐기 2012국민승리 촛불대회를 마치고 보신각으로 이동해서 막걸리 몇 잔을 마셨다. 중간에 이주노조 미셀 위원장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서울본부 행사에 가서 몇 잔을 더 마셨다. 열한시쯤 혜화동 재능고육 본사 앞 노숙농성장에서 뭇 동지들과 애정을 나누다 새벽 다섯 시경 느슨한 뒤풀이를 마치고 온양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2012년 1월 29일.
발이 시렵다. 눈을 뜨니 전철 안. 문 입구라서 그런가? 밖을 보니 성환역을 지나고 있다. 평택 쪽으로 가나 천안 쪽으로 가나 헷갈린다. 앗, 평택방향이다. 그럼, 신창까지 갔다가 다시 서울로 가는 중이구나.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열시가 넘어서 온양온천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를 가지러 간 김에 사무실에 들렀다. 인터넷을 좀 하다 나오면서 '일할 수 있을 때 뭐라도 진척을 이뤄야지' 다시 마음을 다 잡았다.
몸이 무겁고 눈꺼풀이 감기는데도 설화산에 올랐다. 당연히 평소보다 더 많이 걸렸다. 살아 남으려면 시간날 때 올라야 한다. 가기 싫을 때는 '술 마시려면 올라야 한다'고 주문을 걸기도 한다.
내려와선 그냥 방바닥에 무너졌다. '어! 날이 벌써 훤하지? 빨리 출근해야겠네.' 눈을 번쩍 뜨고 움직이렸더니 해가 막 넘어가려는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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